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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소설 ‘화산도’, 반세기 만에 한국어 옷을 입다(보고사 출간)

등록일
2015-10-23
글쓴이
관리자
조회
1982


4·3 소설 ‘화산도’, 반세기 만에 한국어 옷을 입다



제주 4·3의 전모를 다룬 재일동포 작가 김석범의 일본어 소설 <화산도>가 처음으로 완역 출간되었다. 사진은 4·3을 소재로 한 영화 <지슬>의 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제주 4·3의 전모를 다룬 재일동포 작가 김석범의 일본어 소설 <화산도>가 처음으로 완역 출간되었다. 사진은 4·3을 소재로 한 영화 <지슬>의 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김석범 대표작 12권 완역 원고지 2만2천여장 분량 제주 안팎 아우르는 총체상
 
독립운동하다 전향한 중립적 인물 이방근이 중심
좌우 양쪽 모두 거리 두고 화평 노력 기울이다 좌절
결국 적극 행동으로 돌아서
 
“김석범 문학은 망명문학” 동국대선 완역 심포지엄 열려
일본 이와나미판도 새로 나와
                    
화산도 1~12

김석범 지음, 김환기·김학동 옮김/보고사
각 권 1만2000원~1만5000원, 12권 세트 17만원

재일동포 작가 김석범(90)이 제주 4·3을 소재로 쓴 일본어 소설 <화산도>는 80년대 말 이호철·김석희 번역으로 실천문학사에서 다섯권으로 출간된 바 있다. 그러나 원작 <화산도>는 일본에서도 1997년에야 전 7권으로 완간되었고, 실천문학사판은 서장과 종장을 제한 전체 27장 가운데 12장만을 옮긴 것이었다. 김환기·김학동 번역으로 새로 나온 보고사판 12권은 한국에 처음 선뵈는 ‘완전체 <화산도>’다.

<화산도>는 총련 계열 재일조선문학예술가동맹(문예동) 기관지 <문학예술>에 1965년부터 2년 남짓 한국어로 연재되다 중단되었으며 1976년부터는 일본어 잡지 <문학계>에 일본어로 연재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화산도> 한국어판이 완성되기까지는 무려 반세기가 걸린 셈이다.

원고지 2만2천여장에 이르는 대작 <화산도>는 4·3의 ‘전야’라 할 1948년 2월 말부터 무장봉기가 완전히 진압된 이듬해 6월까지 4·3의 전모를 다룬다. 빨치산과 서북청년단, 경찰, 미군, 무고한 도민 등이 죽고 죽이는 살육전을 펼치는 제주를 중심으로, 남북 분단과 이승만 단독정부 수립, 친일파 재등용, 여수순천반란사건, 재일동포와 일본 공산당의 관계 같은 제주 바깥의 굵직한 상황까지 아우르면서 4·3의 총체적 진실에 다가가고자 한다.

소설의 중심 인물 이방근은 일제 강점기 도쿄 유학 중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체포되었지만 전향을 약속하고 병보석으로 출감한 전력이 있다. 부잣집 아들인 그는 그에 대한 자괴감으로 해방 뒤에도 아무런 사회적 활동도 하지 않고 술이나 마시며 세상을 관조하는 중이다. 소설 앞부분에서 술집 여종업원을 놓고 서북 출신들과 싸움을 벌이다가 경찰에 붙들려 온 그는 유치장에서 좌익 지도자 강몽구와 처음 대면하는데, 강몽구가 그에게 하는 말이 정곡을 찌른다. “자네는 요즘 같은 세상에 의외로 태평한 사람이군.”

강몽구인즉 단독 선거를 앞두고 그해 1월에 있었던 검거선풍에 따라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와 있던 인물. 그런 강몽구들을 보며 이방근은 순간 “부끄러운 생각”을 떠올리기도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는다. “나는 나다.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가난한 자에게 열등감을 느끼거나 의식하는 식의 속물적인 감상은 없애야만 한다.” 이 일에 앞서 그의 초등학교 동창이자 지금은 중학교 교사이면서 지하 당원인 유달현은 그에게 머잖아 봉기가 일어날 것임을 알려주는데, 그 소식과 관련해서도 이방근의 태도는 확고하다. “그래도 난 그냥 가만히 지켜만 볼 뿐이다.”

이방근은 물론 사태를 정확하게 판단하는 안목과, 적어도 나쁜 짓은 하지 않겠다는 양심을 챙기는 지식인이다. 그런 그가 친일파를 중용하는 이승만 정권과 제주 도민들에게 행패를 부리는 서북청년단에 우호적일 리 없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좌익의 관념주의와 극단주의에도 거리를 두고자 한다.

재일동포 작가 김석범                    
재일동포 작가 김석범

“물론 반공이 아니면 애국이 아니라는 서청(서북청년단)과 나란히 놓을 수는 없지만, 공산당이 아니면 애국이 아니라는, 아니 인간이 아니라는 주장은 서청과 비슷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조정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김범우와 비슷한 ‘중간자’라 하겠는데, 친일파가 다시 득세하는 세태와 분단으로 나아가게 될 단독 정부 수립 그리고 군경 및 서북청년단의 양민 학살 같은 사태 전개 앞에 끝내 방관자로 물러나 있을 수만은 없게 된다. 빨치산과 토벌대 사이의 충돌이 격화하고 희생자가 늘자 그는 양쪽 사이의 평화 협상을 적극 추진하지만 자신의 팔촌 형이기도 한 경찰 간부 정세용 등의 훼방으로 좌절을 맛본다. 화평 공작이 무산된 뒤 그가 빨치산 대원들의 일본 탈출에 발벗고 나서는 한편 결국 빨치산에 납치된 정세용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총살하는 것은 그로 하여금 더 이상 중립을 지키기 어렵게 만든 상황의 힘을 반증하는 셈이다.

100명이 넘는 인물이 등장하고 무대가 제주와 한반도, 일본에까지 걸쳐 있다고는 해도 1년4개월이라는 시간대에 비하면 원고지 2만2천여장은 매우 방대한 분량이다. <화산도>가 여느 대하소설과 달리 사건 위주라기보다는 사변적인 특징을 지닌다는 점이 그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방근을 비롯한 주요 인물을 바깥으로 끌어내려는 원심력과 그들이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하려는 구심력이 소설 전편을 통해 팽팽하게 맞서는 모습을 보인다. 무장대의 명단을 토벌대 쪽에 넘기고 혼자 탈출을 꾀하던 유달현을 배의 마스트에 매달아 죽게 만든 데 이어 정세용을 직접 처단하기에 이른 이방근은 일찍이 살인과 자살에 관한 독특한 철학을 설파한 바 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을 살해하기 전에 자신을 죽이지 않으면 안 돼. 즉 자살할 수 있는 인간은 살인을 하지 않아. 따라서 가장 자유로운 인간은 다른 사람을 죽이지 않겠지. 살해하기 전에 스스로를 죽이는, 즉 자살할 것이기 때문에.”

그가 산속 동굴에서 열린 ‘인민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정세용을 제 손으로 처치한 뒤 자살하는 소설 마지막 장면은, 비록 순서는 바뀌었어도, 자신의 철학에 충실한 행동으로 볼 수도 있지만 특유의 허무주의의 발현으로 해석할 여지도 없지 않다. 그런 해석을 예상한 듯 작가는 이렇게 강조해 놓았다.

“살육자들이 승리자로서 서울로 개선한 뒤, 폐허의 광야를 가로질러 가는 바람 속에 허무가 있는가. 섬을 뒤덮은 시체가 허무를 부정한다. 죽음의 폐허에 허무는 없는 것이다.”

완간본 <화산도> 번역을 맡은 김환기 동국대 교수(일본학연구소장)는 “김석범 선생의 <화산도>는 4·3이라는 갈등과 살육의 역사를 넘어 화합과 평화 쪽으로 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았음에도 이념적으로 편향된 작품으로 오해되어 왔다”며 “생활사와 민속, 생태지리 등을 두루 담은 총체 소설로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석범은 완간본 한국어판에 붙인 글에서 “<화산도>를 포함한 김석범 문학은 망명문학의 성격을 띠는 것이며, 내가 조국의 ‘남’이나 ‘북’ 어느 한쪽 땅에서 살았으면 도저히 쓸 수 없었던 작품들”이라고 강조했다.

<화산도> 완간을 기념해 16일 오후 1시 동국대 다향관 세미나실에서는 ‘재일 디아스포라 문학의 글로컬리즘과 문화정치학’이라는 이름으로 심포지엄이 열린다. 소설가 현기영과 <화산도> 공역자 김학동(동국대 일본학연구소 연구원), 곽형덕 카이스트 인문사회과학연구소 조교수 등과 가와무라 미나토 호세이대 교수, 호테이 도시히로 와세다대 교수 등 일본 연구자들이 발표와 토론을 벌인다. 또한 일본에서도 그간 문예춘추사에서 나왔던 <화산도>가 이와나미로 발행처를 옮겨 다음달 초에 다시 나오며, 11월8일 도쿄에서 열리는 출판기념회에 노벨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와 문학평론가 고모리 요이치 도쿄대 교수, 작가 양석일, 영화감독 최양일, 강상중 전 도쿄대 명예교수 등 재일동포 문화예술인들이 참석할 예정이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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